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리 하메네이 (문단 편집) == 생애 == 1939년 이란 북동부 호라산 주의 마흐샤드에서 아버지 자바드 하메네이^^(1895년 ~ 1986년)^^와 어머니 카디제 미르다마디 사이에서 8자녀 중 둘째로 태어나 4세 무렵부터 막탑(maktab)이라 불리는 종교 초등학교에 다녔다. 졸업 후 마슈하드의 호라산 종교학교에 진학하였고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Soleiman Khan 종교학교와 Nawwab 종교학교를 5년만에 수료하면서 이슬람 법학, 철학, 논리학 등을 모든 학문의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다.이 후 저명한 이슬람 학자들에게 darse kharij로 불리는 고급 교육을 받은 뒤 1957년 이라크 나자프로 떠나 대학교에 해당하는 신학교에 들어가게된다. 하지만 아버지의 권유로 인해 이란으로 돌아왔고 이란에서 가장 큰 신학교인 콤 학교에서 1964년까지 공부하게된다. 졸업후에는 여러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한때 무명의 성직자로서 돈을 받고 기도를 해 주거나 [[코란]]을 읽어주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세속주의를 표방하는 [[팔레비 왕조]] 치하에서 그는 이란이 이슬람 국가로 거듭나야 한다며 이슬람 근본주의를 강조했다. 하메네이는 이슬람사원, 대학 학생 모임 등에서 근본주의를 설파했고, 이로 인해 경찰에 체포, 구금되기도 했다. 그렇게 1960년대 초반부터 [[호메이니]]를 추종하며 이란 이슬람 혁명에 참여했고, [[이라크]]와의 전쟁이 한창이던 1981년 당시 대통령 [[모함마드알리 라자이]]가 [[이란 인민전사기구|인민전사기구]]의 테러로 [[암살]]당하자[* 이때 하메네이 본인도 오른팔에 중상을 입었고 이후 오른팔이 마비되어 지금도 잘 움직이지 못한다. 하메네이의 평소 사진들을 자세히 보면 늘 오른팔을 옷으로 가리고 있거나 보이더라도 늘어져있는데 바로 이 이유 때문이다.] 대선에 출마해 [[이란 대통령|대통령]]을 지냈다. [[파일:대통령 시절의 알리 하메네이.jpg| width=300&height=400]] {{{-1 대통령 시절의 알리 하메네이}}} 그렇게 1981년부터 1989년까지 이란의 3, 4대 대통령을 지내다가, 1989년 [[호메이니]]가 사망하자 이슬람 성직자 회의를 통해 호메이니의 뒤를 계승하며 [[라흐바르]]로 추대 되었고, 이때부터 명실상부한 [[이란]]의 [[최고지도자]]로 등극했다. 본래 호메이니의 후계자는 호세인 알리 몬타제리라는 이란의 그랜드 아야톨라이자 시아파 이슬람의 최고위급 성지자가 자리매김하고 있었는데, 몬타제리는 호메이니가 독재국가를 세우고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하는 것에 반발해 스스로 후계자 자리에서 물러나 죽을 때까지 가택연금을 자처하였다. 이후 상대적으로 정통성이 낮았던 하메네이가 집권한 뒤, 자신의 취약한 권력기반을 샤리아 폭정으로 메우려 하였다. 2009년 선거에서는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이 압승했다는 개표 결과가 발표되고 몇 시간 뒤에 하메네이는 '''“[[인샬라|신의 뜻]]”'''이라며 아마디네자드의 당선을 추인했는데 이러한 신속한 추인은 이란 내부에서도 뜻밖이라는 반응이 많았는데 왜냐하면 선거관리위원회는 패배한 측에 3일간 반론 기한을 주는 것이 원칙이었는데 이를 무시했기 때문이였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은 "6월 12일은 하메네이가 이란의 역사를 결정한 날로 기록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문제는 이 선거가 부정선거라는 의혹이 일었다는 거고, 결국 반발한 시민들이 무효를 주장하며 시위에 나섰고 이 시위가 반정부 시위로 이어졌다. 그러자 2009년 6월 19일 하메네이는 부정선거 의혹을 강력히 부인하며 반정부 시위를 주도하고 있는 개혁파에도 사실상 최후 통첩을 보냈다. 알리 하메네이는 테헤란대에서 열린 금요예배에서 “지난 대선에서 이란 국민은 자신들이 원하는 인물을 뽑았다”, “이란의 법은 결코 투표 조작을 허용치 않는다”고 말했으며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이 이번 대선에서 전체 40,000,000표 중 24,500,000표를 얻어 당선됐다"라고 아마디네자드를 옹호하며 시위대를 비난했고 결국 이 시위는 어찌저찌 마무리되었다. 문제는 이렇게 허락한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과 하메네이는 2011년 정보장관 인사를 둘러싸고 맞선 뒤 사사건건 대립을 했었단 거다. 그래서 2012년에는 하메네이가 하도 짜증난 나머지 '''“아예 [[대통령제]]를 없애야 한다”'''는 말을 했을 정도다. 그래서 2013년 선거에서는 알리 하메네이가 사실상 선거를 좌지우지 하며 자신의 친정체제를 구축했다. 2013년 선거에서 후보로 나온 마샤이는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는데, 마샤이는 2009년 대선 당시 야당 후보를 지지하고 미국 등 서방사회와의 관계 회복을 주장했으며, 종교의 정치 개입이 제한적인 범위 내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에 하메네이는 그가 자신의 신정체제를 흔들 수 있는 위협적인 존재로 판단했고, 마샤이를 비롯한 당선이 유력시됐던 주요 후보들이 대선 후보에서 줄줄이 탈락하면서 하메네이와 가까운 보수파 인사들이 최종 후보들만 명단에 들어가게 되었고 결국 하메네이와 가까운 사이인 [[하산 로하니]]가 대통령이 되었다. 물론 로하니도 온건파였기에 상당히 갈등했고 하메니이의 성에 차지 않았는지, 결국 이후에는 초강경파인 [[에브라힘 라이시]]가 대통령에 올랐다. 한편 그는 외교에서 현실적이라 계속 적으로 선포했던 미국과도 화해하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란 [[핵]] 협상 과정에서도 그가 상당한 역할을 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 간의 물밑 서신외교가 이란 핵 협상 타결에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2014년 10월 [[제네바]]에서 핵 협상이 시작될 시점에 오바마는 하메네이에게 비밀 편지를 보내 협상 타결에 최선을 다하자는 뜻을 전했으며, 하메네이 역시 답신을 보내는 등의 물밑 교감을 이어왔다고 한다. [[http://m.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685350.html|기사]] 2015년 9월 4일에는 이란 핵 합의안의 의회 승인 절차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http://mobile.newsis.com/view.html?ar_id=NISX20150904_0010267476&cID=10100|기사]] [[메카]] 인근 미나에서 [[성지순례]]([[하지#s-2]]) 도중에 발생한 압사 사고에 대해 알리 하메네이는 “사우디 당국의 실수와 부적절한 대응이 재앙을 낳았다”면서 “참사의 책임은 사우디아라비아가 반드시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사고로 이란은 자국민 131명이 사망하고 6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http://m.kmib.co.kr/view.asp?arcid=0923258977&code=11141300&sid1=int#cb|기사]] 2014년 9월 6일에는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가 전립선 수술을 받았다는 기사가 나왔다. 수술은 잘 끝났고 평범한 수술이였다고 하메네이가 연설도 했다. [[http://m.voakorea.com/a/2442340.html|기사]] 하지만 2015년 12월 14일에는 알리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의 후계자에 대해 “이슬람 성직자 회의 내에 후보자를 검토할 그룹이 설치됐다”며 후보자 인선을 시작했다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http://www.47news.jp/smp/korean/international_diplomacy/2015/12/128332.html|기사]] 사실 체력에 무리가 갈 정도로 나이가 들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미 75세를 넘긴 고령이며, 2019년에 그의 나이가 80세가 되기 때문이다. 건강 또한 좋지 못해 수술을 받을 정도가 되었다. 2016년에는 시아파의 지지를 받던 알님르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처형당하며 [[사우디아라비아-이란 분쟁]]이 발생하게 되었는데, [[시아파]] 맹주인 알리 하메네이는 "탄압받았던 순교자의 피가 뿌려졌다. 신의 분노가 사우디 정치인들에게 내려질 것"이라 주장했으며, 이란 외무부도 "사우디가 테러리스트와 극단주의자를 지원하면서도 국내에선 압제와 처형으로 비판 세력에 대응한다. 이런 정책은 큰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현재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는 서로 국교를 단절한 상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